“본래 그대로의 마음 되찾아 자유자재 얻어야”
“생각에 가로 막혀 소통되지 않을 때 고통 초래 ‘너와 나’ 경계 허물 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저마다 지니고 있는 마음의 보배 사용에 따라 그 가치는 빛이 되거나 어둠이 되기도 합니다”
개원을 기념해 ‘금강경 독송 100일 기도 및 10인 고승 초청 법회’를 진행하고 있는 제주시 오등동 오등선원(주지 제용 스님)은 지난달 29일 5번째 법좌로 부산 금강사․미국 뉴욕 백림사 주지 혜성 스님을 초청, 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혜성 스님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성불의 길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 경전이 금강경”이라고 설했는데 법문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정리=이병철 기자
금강경은 대단히 어려운 경전입니다. 금강경을 수십 번 읽었던 불자들에게도 그 뜻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금강경은 나이․경험․인생에 따라 받아들이는 그릇이 달라집니다.
금강경 번역본만 800여 종류가 발간됐습니다. 서양인들이 성경을 가장 많이 읽는다면 동양인에게 있어 가장 많이 읽는 경전이 금강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시대 천태 스님은 경전을 오시교(五時敎)로 나눴는데 이것을 짚고 넘어가야 금강경을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하신 법문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견성한 후 화엄경(華嚴經)을 시작으로 아함경(阿含經), 방등경(方等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십니다. 이것을 오시교(五時敎)라 하는데 견성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대에 따라 다섯 시기로 나눈 것을 말합니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성도 후 37일 동안 최초로 설한 설법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매한 중생들은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의사가 환자의 병에 따라 적합한 약을 주듯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12년 동안 아함경을, 그 다음 8년 동안 방등경을, 21년 동안 반야경을, 이후 법화경을 8년 동안 설합니다.
《법화경》<신해품(信解品)>에 나오는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를 들어 다섯 가지로 나눕니다.
궁자경악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못난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 놀란 것은 화엄경의 경계이고, 제분정가아함시(除糞定價阿含時)-뒷간의 똥을 치우고 품삯을 받는 것은 아함경의 경계입니다. 출입자재방등시(出入自在方等時)-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것은 방등경의 경계이고, 영지보물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집안산림을 알게 된 것은 반야경의 경계이며, 전부가업법화시(傳付家業法華時)-집안 전체를 전해 받은 것은 법화경의 경계입니다.
‘장자궁자’의 비유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던 부처님의 제자들로 비유되고,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보배까지 안겨주는 ‘장자’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설법을 해도 처음에는 제자들이 이해를 못해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눠 설법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에 깨달은 제자들을 향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부처님은 21년 동안 반야경을 600부로 나눠 설하셨습니다. ‘나는 없다’ 즉, 공(空)사상을 설파하셨는데 그 가운데 금강경이 9부, 반야심경이 579부에 기록돼 있습니다.
금강경의 핵심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입니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한문으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사고하고 있는 생각을 글로 쓰면 ‘심(心)’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발아뇩다라샴막삼보리심은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성불에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함경과 방등경 등에서 육바라밀<六波羅密,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인천인과(人天因果) 등 외적 실천 강령을 이야기했다면, 금강경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이야기가 바로 마음이기에 금강경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나’라는 생각, ‘너와 나’라는 생각, ‘너와 나 사이에 사물’이라는 생각이 서로 첩첩산중처럼 소통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너와 나, 사물의 경계를 허물 때 행복하게 살수 있는 대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한라산에 큰 보배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보배를 캐기 위해 나무와 풀을 걷어내고 잡석을 분리해 냅니다. 그 보배의 효용가치가 통용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사용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참회하는 것은 이런 잡석을 모두 분리해 내고 순수하게 남는 보배를 캐기 위한 것입니다. 보배를 캐면 만물은 통용될 수 있듯 우리가 수행정진을 통해 해탈을 얻어 자유자재해 진다면 어디에서든 걸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산은 내 안에 보배가 있다고 해도 있는 줄 모릅니다. 보배 역시 자신이 산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가치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 가치를 만들고 생각해 낸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보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빛이 되거나 어둠이 되기도 합니다. 보배로 아는 것을 일물(一物), 한 물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일물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을 할 때나 들을 때나 이것을 일물이라고 했습니다. 일물은 바로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21년 동안 설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너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난존자가 “잘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너의 마음속에 있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 두 가지 가운데 주인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부처님은 반야경을 통해 마음에 대해 21년 동안 설하셨습니다. 반야는 무엇입니까. 반야는 생각하고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 금강경에서는 공(空)이라 표현했습니다. 마음과 공은 같은 말입니다. 빌 공(空)를 썼는데 이 뜻은 ꡐ마음이 마음이 아니다ꡑ라고 부정에 부정을 합니다.
한라산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는 것처럼 마음도 본래 그대로 있는데 이름을 ‘공’이라 지은 것일 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나와 함께 있다가도 이 몸이 떨어져 나가면 소소영영하게 남아 그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죄업을 다 짊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업보라 합니다.
금강경 독송의 공덕은 대단합니다. 금강경을 자주 독송하면 천세지업(千歲志業)이 없어지게 됩니다.
금강경을 읽으면 과거 업장이 일시에 나타나서 소멸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읽을 때는 입으로 읽으면 안 되고, 생각으로 읽어야 합니다.
과거․현재․미래가 그 자리에 나타나서 몸과 마음이 이것을 인식하고 식별하는 마음의 작용이 생각에 의해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지긋이 관(觀)해야 합니다. 그 뜻을 알아차리면 몸에는 천색광명이 일어나고 과거 중생업장이 소멸됩니다.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지혜로써 경계를 비추어 볼 줄 안다면 무루(無漏) 공덕이 생깁니다. 이같은 마음으로 금강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금강경을 읽으면 자색광명이 일어나 사과(四果,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는 4가지 단계)를 증득하고 오탁악세(五濁惡世)를 모두 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금강경을 읽으면 심식(心識)이 부동해져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공적(空寂)해집니다. 공적이란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 자유자재함을 얻을 수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금강경을 열심히 읽도록 노력합시다.
혜성 스님은
지난 1963년 불국사에서 서경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통도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통도사 강원을 졸업했다.
스님은 해외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 지난 1984년 미국 뉴욕에 백림사를 창건하는 등 불법 홍포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2005년부터 해마다 금강사에서 ‘차밭골문화제’를 개최하는 한편 다양한 차(茶)를 개발하는 등 차에도 조예가 깊다.
2009-02-11 오후 12:22:33
/정리=이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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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2009년 2월 13일 금요일 제 628호